복음의 폭발적인 능력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경시당하고 있고, 이 능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극소수인지! 만일 바울의 말이 사실이라면, 복음을 가진 사람들은 엄청난 능력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현실은 어떠한가? 불행하게도 많은 교인들의 삶은 탄력을 잃고, 건조하고, 비참할 정도로 무기력하다. 생동감 넘치는 능력보다는 실망과 패배로 가득 차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 사람들이 복음을 제대로 믿고 있기는 한 것일까? 왜 그들의 삶 속에 이같은 다이너마이트의 폭발력의 결여가 뚜렷해 보일까?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믿노라고 공언하는 것을 진심으로 믿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가짜 복음을 배운 것이다. 현 세대가 지닌 심각한 어떤 영적 문제들은 복음을 잘못 이해한 것에 기인한다. 슬픈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통해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이 복음이 자신들 안에서 응당 이뤄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복음의 전폭적인 지원을 알지 못한 채 그들은 실족하고, 자신들의 미약한 믿음으로 겨우 해내는 일에만 머물러 있다. 주님이 베푸신 연회 식탁을 마다하고 식탁 아래의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로 겨우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익히 알고 있는 “상속인 부재” 이야기처럼 그들은 안타까운 상황에 처해있다. 미국의 유수 은행에는 수많은 자산이 실소유주가 나타나 소유권을 되찾아가기를 기다리며 쌓여 있다. 대부분의 상속인들은 자기가 합법적으로 그 정도의 재산을 소유한 것과, 그것을 청구하기만 하면 소유권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러나 이 재물은 자신의 무한한 풍요를 인식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사용하지 않고 있는 영적 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 공언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유물을 주장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속절없는 빈곤과 나약함 속에 살고 있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사탄은 강력하다. 우리는 죄인들의 삶을 옥죌 수 있는 사탄의 놀라운 영향력을 보아왔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죄인에게서 사탄을 쫓아내시고 그의 삶의 주도권을 갖게 되면, 선을 향한 능력은 악의 능력보다 훨씬 강하게 될 것이다. 사탄보다 그리스도 안에 더 강한 능력이 있다면, 죄보다 은혜에 더 강한 능력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탄과의 싸움에서 비기거나 무승부가 날 정도만큼만 강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사탄과의 전쟁에서 이기셨고, 지금 사탄은 패배한 원수이다.
이는 죄인이 사탄을 따르는데 도움을 주는 존재보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따를 때 도움을 주는 존재가 더 강하다는 행복한 결론에 이른다. 이 영광스러운 사실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큰 위안을 줄 것이다. 이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편에 우리의 구원을 바라는 강력한 수호자가 있다면, 구원을 잃는 것보다 구원을 받는 것이 더 쉽다고 결론을 내려도 되지 않을까? 상투적인 대답을 하기 전에, 구원에 관한 두가지 주요한 관점을 들여다보자. 이 질문이 과연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이야기하는지, 또는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기”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 사탄보다 강하시기 때문에 그분께서 친히 자녀들의 구원을 위해 모든 과정을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믿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려고 결심을 하는 것부터 자아와의 고통스러운 투쟁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육신과 영성 사이에 거대한 전투가 벌어졌고, 사탄은 우리를 죄의 굴레에 가둬두기 위해 인간의 모든 약점들을 악용하였다. 그리스도께 완전히 내어 맡기는 것이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보다 쉽다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는 듯 하다. 사탄은 세속적 방법의 삶을 벗어버리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유혹거리를 수백 가지나 가진 듯 보인다.
여기에 더해 마귀는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무엇인가를 왜곡되게 나타내 보일 수 있으므로 하나님보다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죄를 불가항력적이거나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만들 수 있다. 인류의 타락한 본성은 죄로 기울어지기 매우 쉬우며, 악으로 자연스럽게 기울어져 있다. 그리고 개심 이후에도 이런 저열한 본성은 사탄의 미혹과 속임수에 의해 끌어당김을 당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교활한 원수의 미묘하고 간접적인 공격에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28-30).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따르는 사람의 삶에서 어려움과 갈등이 사라질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분은 순종하는 사람들의 길에서는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깃들 것을 설명하셨다. 예수님은 다마스커스로 가던 사울에게 “가시채를 뒤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의 의미는 명확하다. 그분은 사울에게 성령에게 저항하는 것은 고생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불행과 고생이 불순종하는 자의 길에 놓여 있다.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지만, 순종하는 자의 길은 그렇지 아니하다.
우리는 사탄이 과대평가된 자신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입시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죄가 우리를 지배하는 동안에는 악을 행하는 것이 의를 행하는 것보다 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은혜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는 의를 행하는 것이 악을 행하는 것보다 쉬운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들을 주장해야 하지 않겠는가! 성경의 저자들은 사탄이 가진 제한된 능력을 저항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우리도 또한 그러해야 한다. 바울은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로마서 5:20, 21)라고 기록했다.
“죄가 왕노릇 하듯”이란 표현을 주목해 보자. 죄가 어떻게 왕노릇을 한다는 것인가? 바로 지배하는 힘을 말하는 바일 것이다. 영적인 깨우침을 물리침으로서 육적인 본성은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려는 은혜의 모든 시도를 무력화시켰다. 하지만 은혜가 죄악보다 “더욱 충만”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죄악이 왕노릇했던 것처럼 은혜도 또한 왕노릇하게 될 것임을 기억하자”! 당연하게도 은혜는 우리를 지배하는 능력이 되어 죄가 우리 삶에 들어오려는 모든 시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가! 순복한 삶에서 발휘되는 복음의 충격적인 폭발력과 견줄 수 있는 폭발력이 마귀에게는 없다.
다시 한번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사탄을 따르는 것보다 어려운 일인가? 우리가 악한 능력보다 선한 능력에 더 많은 접근성을 가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어떤 사람은 “사탄”을 따르는 것이 쉽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사탄은 예수님의 이름을 듣자마자 도망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해주겠다. 사탄은 당연히 여러분이 구원을 잃기 원하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더 강한 편에 붙어있는 한 여러분은 항상 승리할 것이다. 예수님은 마귀에 대한 그분의 지배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누가복음 11:21, 22).
언급된 강한 자는 물론 사탄이다. 그는 가장 지혜로웠던 사람(솔로몬)보다 강했고, 가장 힘이 쎘던 사람(삼손)보다 강했고, 가장 완벽한 사람(아담)보다도 강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보다 강하지는 않다. 그리스도는 “저를 이긴” 더 강한 분으로, 사로잡혀 있던 이들에게 자유를 주셨다. 이것은 정말 감격적인 사실이다!
정말 놀라운 사실이다! 구원을 거역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우리가 저항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를 자기에게로 끌어당기실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디도서 2:11)났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은혜가 나타났는가? 우리 모두에게 나타났다! 히브리서 2장 9절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임을 맛보셨다고 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고린도후서 5:19)신 것이었다. 온 세상이 구원받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간단히 말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섭리와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를 거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의 길에서 매우 어려운 점은 마음과 육체가 죄에 단단히 얽매여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돌이키기보다 자기가 가던 악의 길을 계속 가는 것이 쉬운 이유이다. 그들 안에는 육신의 의지를 저항하는 노력을 할 능력이 전혀 없다. 하지만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죄를 혐오하기를 속히 배울 것이며, 양심을 타협해 의도적인 불순종을 하는 것을 매우 비참하게 여기게 될 것을 단언하는 바이다.
그렇다면 구원받는 것이 쉬운지 아니면 잃는 것이 쉬운지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가? 진실되게 말해서 이기적 삶에서 최초로 돌이키기는 쉽지 않지만,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인의 길로 바쳐진 다음에는, 모든 면에서 그 길로 계속 가는 것이 더 행복하고 쉬운 일이 될 것이다. 이 영광스러운 사실의 이면에 있는 신학을 살펴보자.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3:24-26).
십자가가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되었지만 오직 “예수 믿는” 사람들만이 개인적으로 의롭게 될 것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위 성경절에서 “그의 피”를 힘 입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전력회사에서 충분한 전기를 공급받는다고 해도, 집에서 스위치를 누르지 않으면 아무런 혜택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하시고 깨끗케 하시고, 의롭게 하시는 능력 또한 나의 개인적인 삶 속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이다.
위의 말씀은 또한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 또한 의롭게 되는 경험의 일부라고 이야기한다. 죄의 간과하심 또는 용서하심이 과연 어떻게 일어나는 일일까? 많은 사람들이 믿는 자들의 삶과 관련 없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수억 광년 전에 있었던 어떤 신비한 사건 덕분에 용서가 생겨나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의 변화가 이르러 온다고 여긴다. 용서가 하나님께 영향을 미쳐 그분이 나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으시도록 태도를 바꾸셨다는 것이 사실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용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하나님은 변할 필요가 없으신 분이다. 그분은 또한 오류가 없으시다. 인간이야말로 변할 필요가 있는 죄인이다. 그분은 어떠한 은혜나 용서도 허락되어지지 않은 깨어진 율법 앞에서 정죄를 받았다. 율법에서 얻을 수 있는 의로움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옳은 일을 하는데 어떤 힘도 제공할 수 없었다. 죄인은 그 율법의 채찍질 아래서 무력하고, 정죄받고, 속수무책이었다.
바울은 정죄함이 의롭다 하심의 정반대가 된다고 표현하였다. 로마서 8장 1절에서 4절에 바울은 의롭다 하심에 각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무엇을 실현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즉각적으로 육신이 율법을 순종하기에는 너무나 나약하다는 사실에 문제가 있음을 보게 된다.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만 했다. 위의 성구에서 의롭다는 단어의 그리스 원어는 디카이마(dikaima)인데 정당한 요구조건이라는 뜻이다. 어떻게 해야만 연약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여 사람이 율법의 요구점들을 이룰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예수를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시며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도록 하셨을 때 이미 완전한 해결책을 제시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개인에게 의로움을 입혀주시는 것이 가능한 유일한 이유는 오로지 그분께서 완벽한 순종의 생애를 사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오심이 나의 육신의 연약함을 돕지 못한다면, 그 계획은 실패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생애 안에 들어오시면, 정죄함이 거두어지고, 죄는 용서받고,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이것이 용서가 우리 생애에 가져오는 변화이다.
용서는 하나님이 아닌 우리에게 변화를 가져온다. 그분께서는 경건치 못한 자의 경건치 않음을 제거하시므로 의롭게 만드신다. 또한 반역한 죄인의 반역을 제거해 가심으로 의롭게 만드신다. 그분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면, 그분의 스스로 이루시는 말씀이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 그는 진리가 아닌 것을 선포하지 않으신다. 사탄을 정복하신 분께서 이제 죄의 권세에 대한 승리를 얻게 하시려고 인류의 마음 속에 들어오신다. 새로운 삶의 기적에 대해 성경은 매우 환상적인 표현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수 있고(빌립보서 2:5),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으며(베드로후서 1:4),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이 함께 하고(에베소서 3:19), 죄에서 해방될 수 있다(로마서 6:18). 은혜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순간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며, 이 능력 아래서는 사탄이 그 어떠한 기회도 엿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더욱 자신감을 가져야 하고, 전능하고 승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일에 더욱 공격적이고 담대해 져야만 한다. 우리는 육신의 힘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활동해야 한다.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는 분은 우리를 대적하는 자보다 위대하시다. 이 약속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자!
이제 이 질문을 곱씹어 보자. 그리스도인이 되면 왜 예수님을 섬기는 일이 어렵지 않게 되는가? 이 질문을 잘 이해하기 바란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거듭난 경험을 한 사람을 일컫는다. 그리스도인 삶을 쉽게 살 수 있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데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사실, 세상에 육신의 힘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려는 시도를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많은 퇴행성 질환과 약화된 신체는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여러 세대 동안의 분투로 인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은 이런 헛된 노력으로 인해 지치고 낙담해 버렸다.
어떠한 노력이나 투쟁이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순종하는 삶이 기쁨과 즐거움이 되고 승리는 확실히 보장되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한일서 5:3). 위대한 사랑의 사도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 사랑의 관계에 따라오는 열매가 될 때, 그것이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시편의 저자는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편 40:8)라고 하였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 주님을 섬기는 것은 결코 힘든 것이 아닌 데에 분명한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고 자기에게 선한 일만을 베푸실 것이라는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둘째, 그는 그리스도를 최고로 사랑하고 그분을 슬프시게 만드는 선택은 일말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는다.
잠시 생각해보자. 이것은 매우 엄격한 요구사항이고 시행하지 않으면 크나큰 벌이 따른다. 의사가 제시한 법칙을 어길 시 목숨을 부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이것을 따르는 것이 힘든 일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매일 끼니를 챙겨 먹도록 끌어당기는 더 큰 생리적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나는 그것을 즐겁게 그리고 기꺼이 할 것이다. 내가 밥을 먹는 것은 내 자신을 위한 일이지, 의사가 엄격하게 요구하는 일이라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모든 그리스도인 생활에 작동하는 사랑의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확장되어 오는 것이다. 성경의 계명과 형벌에 대한 내용은 어떠한 경우라도 위협이 되지 않는데, 스스로에게 최선의 유익이 되도록 그러한 순종을 하게 이끄는 더 고차원의 법칙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형벌의 두려움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분께 순종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기에 하는 것이다.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 다른 예를 상상해 보자. 내가 한달간 전도여행을 떠난다고 가정해 보자. 아내가 떠나는 나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서류를 건내준다. “여보, 한달간 집을 비우는데 돌아오기 전에 수표를 꼭 보내주세요. 이 서류를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매릴랜드주법 392조인데, 집에 날아온 고지서를 제때 납부하지 않으면 당신이 감옥에 간다는 내용입니다. 교도소 생활이 결코 편한게 아니니 당신 급여를 받는대로 저에게 송금을 해주기를 기대할게요.”
아내의 말은 전적으로 옳은 것이지만, 내가 가족을 부양하는데 이런 협박이 과연 필요할까? 그렇지 않다! 나는 고귀한 사랑의 법칙을 따라 나의 사랑하는 가족을 돌보고 있다. 사랑은 의무를 기쁨의 특권으로 바꿔준다. 나는 좋아하던 여자친구를 만나려고 비를 맞으며 무려 16키로 이상을 걸은 적이 있다. 지금까지도 전혀 후회하지 않는 일이다. 사랑의 힘이 나를 힘든 일도 견디게 했다. 우리가 취하는 태도와 맺는 관계에 따라서 어떠한 일이든 부담스러운 일로 만들 수도 있다. 우리가 예수님과의 관계가 틀어진 경우가 아니라면 예수님을 섬기는 일은 짐스러운 일이 아니다.
만일 누군가 새 신부에게 와서 이런 절망적인 말을 쏟아낸다면 어떨까? “오 이런, 너는 이제 큰일났어. 이 남자를 위해서 일생 동안 내내 요리만 해야 한다고 생각해봐. 집안 청소도 해야지, 옷 수선도 해야지, 어수선한 습관들도 참아내야 할테지. 결혼은 참 못할 짓이야.” 이 젊은 신부가 뭐라고 답을 할까? 아마도 그녀는 “너무 잘 됐네요! 저 그 일들을 좋아해요!” 라고 말할 것이다.
누군가가 방금 예수님과 “결혼”한 새로 침례받은 그리스도인을 다음과 같은 말로 낙담시키려 한다고 가정해보자: “오, 너는 지금 굉장히 혼란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이제부터는 술도 못마시고 춤추러 가지도 못한다고 생각해봐. 안식일에 스포츠 구경도 못가고, 돼지고기와 새우도 더이상 먹지 못해.” 의문의 여지 없이 방금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반짝이며 대답한다. “너무 잘 됐네요! 저는 그런 매 순간이 소중할 것 같아요!”
이런 대답이 가능한 이유는 고린도후서 5장 14절의 내용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자기를 위해 돌아가신 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그 무엇이든지 모두 다 하도록 추진하고 강권한다. 그분의 제자들을 봉사와 순종의 길에 얽어매는 무거운 멍에란 없다.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이 생명 나무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또 그 문들을 통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계시록 22:14 / 한글 KJV). “복이 있다”고 한 말은 “행복하다”로 해석할 수 있다. 계명을 속박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랑의 속박을 받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거듭나지 않은 마음에는 이런 개념이 생소하고 모순적으로 보일 것이다.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행복한 결혼을 통한 이기심 없는 사랑의 관계를 가치있게 여기지 못할 것이다. 어떤 부부는 서로에 대한 사랑이 깨져서 결혼관계를 괴로운 속박으로 보기도 한다. 문제는 결혼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태도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깨고 멀어져가면, 종교의 속박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종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평하는 사람의 사랑이 식어버린 것에 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자아를 부정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일까? 예수님은 분명히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누가복음 9:23)고 하셨다. 이 말씀이 과연 순종의 길이 어렵고 불행한 것이라는 의미일까? 아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우리의 주의를 경쟁적으로 빼앗아갈 것들이 있음을 현실적으로 알려주신 것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하려는 세상적인 그리고 육적인 유혹들이 자아를 항상 괴롭힐 것이다. 고상한 애정으로부터 오는 강력한 감화가 없다면, 그러한 유혹의 감성에 압도당하고 말 것이다. 여기에 사랑의 능력이 지닌 통제선이 드러난다. 예수님의 강력한 사랑은 육신과 사탄,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쉴새 없이 닥쳐오는 유혹들에 대해 “싫어”라고 말하게 하고, 예수님께로 이끌리도록 끌어당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내가 예수님과 관계를 계속 이어 나가는지를 시험해 보려 할테지만, 나는 두가지의 이유로 예수님 편에 서기를 계속해서 선택할 것이다. 바로 내가 예수님을 세상의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사랑한다는 점과 그분께서 나에게 최선의 것만을 베푸실 것을 아는 것이다.
사탄이 거룩하게 된 사람들에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감정이지만,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은 육신과 감정은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의롭고 진실되기 때문에 섬기는 것이지 우리의 감정이나 기분 덕분에 섬기는 것이 아니다. 기분을 따른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거절하고 육신을 위해 살게 되었다. 마귀를 따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이유는 감정에 의해 속임을 당하고 눈이 가려졌기 때문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죄의 얄팍한 속임수에 끌려가는 것을 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그들이 흡연이나 음주 또는 자기파괴적인 중독 행위에서 진정한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마치 로봇처럼 육체적 욕망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다.
월터 윈첼이란 사람은 신문 기고글에 이렇게 묘사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들은 모여 앉아서 자기들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 브로드웨이 거리는 행복을 위한 오락 장소로 가득하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불행에 흠뻑 젖어있다.”
문제는 이런 수백 수천의 사람들에게는 삶 속에서 역사하는 영적 사랑의 고귀한 법칙을 받아들일 힘이 없다는 점이다. 저항하는 작용이 없으면, 육신은 사람의 마음과 육체를 지배하는 영향력을 갖게 된다. 자아는 외부의 자극에서 오는 감정적인 호소에 반응하여 육신의 노예가 되는 수 밖에 없다.
노동수용소에서 있었던 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사람이 사형을 기다리는 무리로 가득찬 수용소의 철조망 너머에서 보고 있었다. 그 안에는 수감자들이 수척한 몸, 움푹 들어간 볼, 푹 꺼진 눈을 한 채 서 있었다. 굶주린 죄수들의 구경거리를 보고 있던 남자에게 한 수감자가 외쳤다. “흥! 너는 여기로 들어올 수가 없어, 그렇지?”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리자 곧바로 도발에 대응했다. “누가 못들어간대? 두고보라구” 그리고는 철조망 밑으로 기어서 반대편에 있는 슬픈 얼굴을 한 죄수들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아마 이 이야기가 수많은 사람들이 주제넘게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율법을 범하는, 무분별한 죽음의 무도회를 가장 잘 묘사한 것 같다. 매우 놀랍게도, 자아는 제 가고 싶은 길을 가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 수도 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그 압제를 저항할 길이 없다. 그들에게는 옳은 행동을 하기보다 잘못된 행동을 하기가 쉬워 보인다. 그리스도와 깊은 사랑을 나누는 사람에게는 옳은 행동을 하는 것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라는 영광스러운 진리를 다시 반복하고 재확인하자.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순수한 복음이 주는 가장 기쁜 소식이다. 나는 전세계의 독자들에게 이것을 제시하고자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폭발적인(다이너마이트) 능력을 주기위해 오셨다. 우리는 죄가 가져온 죄책감과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단순하면서도 아무 값없이 제공된 복음의 섭리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시간대 곧 과거, 현재, 미래에서 보장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그분의 은혜를 단지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거나 적용하는데 그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주어진 재원과 능력(두나미스)의 풍요로움을 누리게 되기를 바란다.
왜 우리가 몇달씩 싸워서 마귀를 마침내 몰아내 버리지 못하는가? 그것은 마귀가 우리보다는 쎈 상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년 내내 열심히 싸울 수 있겠지만, 연말까지 가본들 그는 우리보다 강한 상대이다. 우리는 항상 우리보다 더 강한 원수를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노력한다고 해서, 단 일격만으로도 죄의 마력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연악함과 패배의 해답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친절하고 숭고한 비법으로 이끈다.
먼저, 하늘의 모든 선물들은 성경의 약속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며,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베드로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는 보증이 있음을 기록했다(베드로후서 1:4). 어마어마한 능력이 스스로 성취시킬 수 있는 약속 안에 저장되어 있고, 믿음으로 그것을 주장하는 모두를 위해 주어진다. 그것을 믿는 그 순간, 믿는 자에게 그 축복이 주어진다는 것을 기꺼이 믿는 사람이 너무 적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꼭 이루신다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믿는 사람이 왜 이리도 적은 것일까?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 것으로 주장할 수 있는 신자들이 밟을 수 있는 네 가지의 단계를 성경을 통해 보면서 승리의 본질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네개의 성경 구절이 놀라운 계약 관계에 대해 밝혀준다. 첫째 성경절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린도전서 15:57) 라고 기록하였다. 이 말씀이 주는 황홀한 맛을 충분히 음미해 보자. 승리는 선물이다!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착한 척해서 자격을 얻은 것도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바로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대가 없이 승리를 주실 것이다. 그분은 사탄에게서 승리를 얻으신 유일한 분이시고, 우리가 승리를 선물로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오직 그분을 통하는 것 밖에 없다.
한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여러분의 삶 속에 자신을 얽매고 비참하게 만드는 죄의 습관을 극복하고 승리하고 싶지 않은가? 어떤 사람들은 식욕을 이기지 못하거나 술이나 담배에 매여 있는 사람도 있다. 부도덕하거나 화를 참지 못하거나 또는 세속적인 것들과 무기력한 투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승리의 선물을 여러분들도 가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 만일 예수님께 간구한다면 여러분도 그 능력을 갖게 될 것을 믿는가? 하나님께서 그런 승리에 대한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실 것을 여러분은 얼마나 확신하고 있는가? 그것에 대해 매우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진실한 만큼 확실한 방법이다.
두번째 성경 구절은 마태복음 7:11이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여러분이 담배라던지 다른 색육적이고 부도덕한 것에 대해 승리를 간구하는 것이 좋은 일이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 그리고 이런 일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지 여쭤볼 필요조차 없다! 이미 성경 말씀을 통해 죄와 마귀의 일을 끝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우리가 돈이나 더 나은 돈벌이를 위해 기도할 때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뜻인지 여쭈어야 할테지만, 죄에 대한 승리에 관해서는 믿음으로 간구하는 모두를 위해 약속이 이미 주어져 있다.
우리가 요청하면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까? 예수님은 마치 배고픈 자녀에게 음식을 먹이려는 부모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제공하실 것이다. 또 여러분의 믿음에 대한 보상을 하고 싶어하시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이다. (빌립보서 4:19) 이러한 약속들이 제약 없이 그리고 제한 없이 주어짐으로 우리의 마음에 충격을 줄만하다. 왜 우리가 이런 은혜의 섭리를 받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실 것을 왜 그렇게도 쉽게 믿지 못하는 것일까?
여기 다음 질문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요구한 다음, 승리를 얻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단순하게,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러하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분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다. 우리가 간구한 바로 그 순간, 이루어질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선물에 감사를 드리면서,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증거나 표식 등을 요구한다거나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 약속에 담긴 스스로 이루어지는 능력은 오로지 우리의 믿음에 여부에 의해서만 발휘될 것이다.
다음은 로마서 6:11절에 세번째 성구를 보기로 하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서 ‘여긴다’ 라는 표현은 ‘믿는다’ 또는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믿음의 실천은 승리를 얻기 위한 간구에 촛점을 맞추어야 하며, 그 후에는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베드로가 물 위를 어떻게 걸었는지 기억하는가? 베드로가 배에서 나와 물 위를 걸어도 되는지 예수님께 먼저 여쭈었고, 예수님께서는 오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베드로는 얼마나 오랫동안 물 위를 걸으며 불가능한 일을 했는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마태복음 14:30)라고 성경에 기록되었다.
베드로가 두려워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물에 가라앉거나 빠지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고 약속하셨음에도,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의심했다. 바로 그 순간이 그가 가라앉게 된 시점이다. 예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믿음에 따라 행동하기만 했다면 그는 안전할 수 있었다. 의심했을 때는 가라앉은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어떤 것이 불가능처럼 여겨지는가? 물위를 걷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담배 습관이나 다른 괴롭히는 죄를 극복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승리하게 하리라.”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 한, 여러분은 승리를 얻은 것이다. 이처럼 매우 단순한 일이다. 승리를 얻기를 간구하는 바로 그 순간, 능력의 저장소가 여러분의 삶 속에 들어서는 것이다. 여러분이 느끼지는 못하더라도 그 일은 분명히 일어난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한 계속 간직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죄로부터 얻은 해방이 너무나 감격적이어서 죄에 대한 욕구조차 잃어버렸다고 한다. 어떤 담배 중독자들은 흡연 욕구로부터 해방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늘 이런 방법으로 역사하지는 않으신다. 때로는 욕구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유혹이 이르러 올 테지만, 그것을 넘겨버릴 수 있는 능력이 안에서부터 솟구쳐 나오는 것이다. 믿음은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이 온전히 소유하게 된 승리를 끊임없이 주장하는 것이다.
승리를 위한 마지막 단계는 네번째 성구인 로마서 13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능력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해서 다시는 그 죄의 권세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구태의연한 시행착오 요법에는 항상 실패에 대한 대비가 있다. 흡연을 하던 사람은 담배를 선반 위에 꼭꼭 숨겨둔 채 “나는 담배를 반드시 끊을테지만, 만일 실패하게 되면 담배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어”라고 혼잣말을 한다. 하지만 믿음으로 세운 계획을 가지면 인간적 나태함에 기인한 실패를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승리는 우리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실패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실패하실 수가 없다. 담배는 내어 던져버리자. 타협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는 계획은 모두 내다버리자.
지미라는 소년이 어머니의 말씀을 어기고 수영장을 가고 말았다. 왜 어머니 말씀을 어겼냐고 하자 지미는 “제가 유혹을 받았기 때문이에요”라고 했다. 어머니는 “아침에 네가 수영복을 들고 나가는 것을 보았어. 왜 그랬니?” 라고 했다. 그러자 지미는 “유혹을 받을 것을 예상했거든요”라고 했다. 승리를 얻고자 하면서 스스로의 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들은 실패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사실에 대해 실망할 수도 있다. 사람이 실패할 것을 예상한다고? 베드로조차도 물에 빠졌다. 승리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베드로의 실패는 하나님의 능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물위를 걸으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의지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데 있어서 베드로에게 필요했던 것은 더 큰 믿음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약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능력을 얼마나 완전히 신뢰하는지 스스로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성경의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을 통해 능력과 승리를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이 감소되지는 않는다.
받는 사람의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약속도 이루어질 수 없다. 이것의 한계는 예수님의 말씀에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다. “너희의 믿음대로 되라”(마태복음 9:29).
이 모든 것이 이토록 간단하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히 효과가 있다! 여러분이 구원 받기 원하기만 하면, 믿음은 분명히 작용할 것이다. 죄를 기꺼이 포기하기 않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약도 없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것을 원하기만 한다면, 여러분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승리, 능력, 구원 – 이것들은 여러분 앞에 놓여 있고 믿음의 손을 뻗기만 하면 된다. 지금 이 순간 그 사실을 믿고 내 것으로 만들자. 하나님은 여러분이 자유를 얻기 원하신다.